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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그 다음은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저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별 의미 없는 공간으로 치부하는 이도 있을 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집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품은 곳이자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미래가 서서히 그려지는 장소다. 그리고 그곳에는 함께하지 못한 누군가의 공백과 전해지지 못한 감정의 흔적,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들이 남긴 기척이 겹겹이 쌓여 있다. […]

이 혜진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저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별 의미 없는 공간으로 치부하는 이도 있을 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집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품은 곳이자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미래가 서서히 그려지는 장소다. 그리고 그곳에는 함께하지 못한 누군가의 공백과 전해지지 못한 감정의 흔적,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들이 남긴 기척이 겹겹이 쌓여 있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에게 있어 집이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공간이자 한 가족의 역사가 머무는 자리였다.

그의 신작 <센티멘탈 밸류>에서 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영화의 중심이 되는 장치로 등장한다. 각본가 에스킬 보그트와 함께 대본을 쓰던 당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가족이 대대로 물려받아 온 집이 매물로 나오면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집’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감독의 어머니가 조부모의 집을 매각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글을 써 내려갔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영화 속 보르그 가족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집’은 영화의 다섯 번째 주인공인 셈이다.

“집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아름다운 장치다. 집은 삶 속에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돌보는 존재처럼 기능하기도 한다. 그냥 집일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순간들, 이미 지나간 모든 것이 담고 있는 분위기,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의 가능성까지 담겨 있다.” — 잉가 입스도테 릴리오스 (아그네스 역)

오프닝 시퀀스는 유년 시절 노라와 아그네스가 살았던 집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열두 살 노라가 작성한 학교 과제 속 묘사를 통해 플래시백이 펼쳐지는데, 노라는 집의 시점에서 여러 세대를 거치며 가족을 지켜본 시간을 서술한다.

“아버지가 떠난 뒤 집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 부모님이 만들어낸 소음은 사라졌지만 집은 아빠가 만드는 소리를 그리워했다.”

기억 속에서 노라는 동생 아그네스를 돌보는 보호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 돌아오면 관계는 뒤바뀐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추모 모임을 준비하는 집에서,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는 노라를 오히려 아그네스가 살피고 걱정한다. 어린 시절 노라가 아그네스를 지켜온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다.

집은 이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달라지는 관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소다. 감독은 이번 작품 역시 여태 다뤄온 주제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부족한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가까운 관계 속에서 더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 노라가 대표하는 ‘혼란’과 아그네스가 대표하는 ‘침묵’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혼란과 침묵, 그 아슬아슬한 균형 위로 오랫동안 부재했던 아버지 구스타브가 등장한다. 유년 시절 이미 균열이 간 보르그 가족의 집은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며 차츰 붕괴된다. 예술가인 그는 복귀작이 될 시나리오를 들고 와 주연을 노라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노라는 갑작스럽게 집을 떠난 아버지와 그가 남긴 상처를 기억하고 있으며, 제안을 거절한다. 

극중 노라의 직업은 연극배우다. 그녀는 인물을 구축하는 과정 자체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때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더 안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라에게 있어 연기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인 동시에 자신을 숨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이입함으로써 자신을 견디려는 태도는 그녀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평생을 애써온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아버지와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부정하려 할수록 닮아 있다는 사실은 더 또렷해진다.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따라가는 이야기 속에서 집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그렇게 영화는 미워하면서도 닮아있는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의 연결고리를 차분히 응시한다.

극중 구스타브와 마찬가지로, <센티멘탈 밸류>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레나테 레인스베와 스텔란 스카스가드, 두 배우를 염두에 두고 각본을 썼다. 특히 스텔란 스카스가드의 경우 개인적 인연이나 작업 경험이 없었지만 시나리오 집필 중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직접 연락해 그를 찾아갔다.

“스텔란 스카스가드 없이 이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한편 레나테 레인스베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이후 다시 한번 요아킴 트리에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젊고 즉흥적인 ‘율리에’를 연기했던 그가 이번에는 삶의 궤적과 무게를 지닌 연극배우이자 구스타브의 딸 ‘노라’ 역을 맡았다. 감독은 레인스베가 지닌 예측 불가능함과 신비로움, 동시에 단단한 연기가 노라라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센티멘탈 밸류>는 떠나간 것과 남겨진 것,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을 하나의 공간 안에 겹쳐 놓는다. 집은 인물들이 돌아오고 머무르며 다시 마주하게 되는 감정의 중심이 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화해는 감정을 봉합하는 일이 아니다. 화해를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동의하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채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상태’로 바라본 것이다. 서로에게 무의식적으로 남기는 감정과 상처,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기억의 무게는 사라지지 않고 공간 속에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어디로 돌아가고, 무엇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집이라는 장소는 끝내 누구의 기억으로 남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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